일제 강점기에 얼마나 많은 자동차가 있었을까?

글/디자인문화 연구가 이문석
지난해 큰 인기를 얻었던 영화 ‘암살’에는 ‘삐까뻔쩍’한 자동차들이 여럿 등장하며, 암살 작전의 매우 중요한 매개로 활약한다. 친일파를 암살하기 위해 자동차 접촉사고를 내면서 본격적인 작전이 시작된다. 자동차를 방패로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하고, 아슬아슬한 추격신이 등장하며, 오늘날 블록버스터 못지 않은 볼거리 가득한 자동차 액션을 보여준다.

게다가 나무로 차체를 짠 차도 나오고, 금속으로 된 차체의 둥근 곡면이 멋진 유선형 자동차, 미끈한 유선형 외관에 두 가지 색으로 배색해 멋을 낸 차, 보조석이 달린 오토바이, 옥수수를 잔뜩 실은 트럭과 전차까지 여러 종류의 차량이 나와 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영화의 소재가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한 것이니 이 영화 속 자동차도 완전한 허구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1930년대 경성에 자동차는 그리 낯설지 않은 물건으로 자리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면 그 당시,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자동차가 있었을까?


자동차의 첫 등장, 추측만 있고 기록 없어

자동차가 처음으로 이 땅에 선을 보인 것은 외부 문물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근대 초기였을 것 이라 본다. 먼저 국교를 맺은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의 외교관만이 아니라 미지의 나라, 은자의 나라를 찾아 먼 바다를 건너온 선교사, 의사, 여행가, 사업가 등 많은 외국인이 인천을 거쳐 한양으로 들어오면서, 여러가지 물건을 가방 속에 든든히 챙겨 가지고 들어왔을 것이며, 일부는 마차나 자동차도 가져와 낯선 이국의 땅에서 지낼 만반의 준비도 했을 것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새로 국교를 수립한 나라에서 파견한 공사나 고문 외에, 기독교를 전파하고 병원과 학교를 세워 조선의 근대화에 이바지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와 같은 선교사, 그리고 근대 문물의 수입 창구로 각종 서양 의약품, 화약, 석유, 바늘 등을 들여 온 세창양행, 이화양행, 타운선상회의 사업가 등 이들 중 누군가가 자동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아직 문명개화하지 못한 조선인의 눈을 틔워 주고 머리를 깨워주는 당대 최고의 기술 문명의 정수를 선보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의 자동차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1909년 영국 화보지에 실린 한 장의 일러스트가 자동차 역사의 초창기 흔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어찌 되었든 근대 초기 자동차가 국내에 알려졌으니 자동차를 알게 된 고종이 1903년 미국 공사를 통해 차 한 대를 들여왔다는 설도 전하고, 1906년에는 ‘대한매일신보’에 권병수가 자동차 회사를 설립하려고 차를 5대 주문했다는 기사도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초창기의 역사는 열강의 침탈과 격변하는 근대의 역사 속에서 그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지방도로는커녕 한양 도성의 웬만한 길조차 우마차 한 대 지나가기가 빠듯한 좁은 도로였던 상황에서 그 비싼 차를 들여오는 것이 무의미했을 테지만, 고종이 도시 개조사업을 추진하고 도로를 정비·개수하는 등 문명개화한 세상으로 하루빨리 나아가려는 열망이 팽배한 시대에 자동차를 그저 들리는 소문으로만 두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기록도 유물도 없다 보니 자동차가 달릴 만한 넓고 평탄한 길도 없고, 연료 공급도 원활치 않고, 고장이 나더라도 수리할 만한 기술자도 부품도 없는 시대에 자동차를 들여오려는 시도만 했거나 들여왔더라도 곧 반출했을 것이라 추측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처럼 근대 초기 이 땅에 자동차가 몇 대나 있었는지, 누가 들여왔는지, 어떻게 들어왔는지에 관해 거의 알 수 없는 시대를 지나 우리의 자동차는 일제강점기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된다.



1911년 자동차 도입에 관한 공식기록 등장

일제 강점 후 1911년 자동차 도입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이 비로소 나타나면서 국내 자동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 고종과 총독을 위해 들여온 기록이 최초였고, 우리나라 자동차 보유대수 2대로 시작하는 역사의 출발점이었다. 일제가 왕실을 회유하기 위해 고종에게 선물한 것이라는 배경과 함께 자동차 역사의 첫 장이 열리는 것이다.

곧이어 자동차를 구입한 사람들이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1913년 순종의 캐딜락이 들어오고, 순정왕후의 다임러, 의친왕 이강의 오버랜드, 이준 등 왕실에서 자동차를 타기 시작했다. 순종은 가마 대신 자동차를 타고 앞뒤에 기마병의 호위를 받으며 자동차 행차를 했다고 한다.

이외에 윤택영, 박영효, 이완용 등 왕실 친인척과 고위 관료들, 천도교 교주 손병희와 지주, 사업가들이 합세했다. 광산 부자 박기효, 서울 갑부 김종성, 경성방직 김연수, 대창광업 최창학, 영보합자 민규식, 대동광업사 이종만, 화신백화점 박흥식 등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마이카를 누린 주인공들이었다.

이처럼 자동차는 1911년 2대가 처음으로 들어온 후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4년 만인 1915년 70대에 이르렀고, 70대 중 40여 대가 경성에서 운행되었다. 이 외에 인력거 1천대, 자전거 2천대, 종로 통을 오가던 전차가 근대로 이행하는 경성의 일상 속에 있었다. 1920~30년대 공업화와 경제성장의 기조 속에서 빠르게 늘어나 1940년 1만여 대에 달했다가, 이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급격히 감소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동차라는 신기술은 조선에 침투할 수 있는 장치로 일본인이 독점한 채 조선인의 기술 습득을 철저하게 배제해 왔던 분야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국주의적 침략정책의 틈새에서도 정비기술을 익힌 조선인이 배출되었고, 경성서비스라는 정비공장의 설립을 보게 된 것이다.

조선인 기술자는 1915년 정동에서 자동차 판매점을 운영하던 미국인에 의해 처음으로 탄생했다. 고객들의 차량을 수리해 주는 일도 겸하면서 이 공장에서 조선인에게 기술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후 정무묵이 일본에 건너가 신기술을 배우고 돌아와 1922년 경성 서비스를 설립하면서 전문적인 자동차 정비기술이 조선 내에 정착하게 되었다.

경성서비스 이후 중앙모터스, 대동모터스 등이 더 생겨나면서 정비는 조선 자동차 기술의 중심을 이루었고, 1930년대 넘어서는 차체 제작업과 단순한 부품을 제작하는 공장도 여럿 생겨나며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었다.

게다가 경성서비스는 조선공업이 싹트는 중요한 지점에서 자동차 기술이 독립된 분야로 전개되는 과정에 있었다. 자동차 기술은 대부분 자동차 판매점을 운영하는 사람이 고객의 차나 자기 차량을 수리하기 위해 정비업을 겸하거나 운송업을 하는 사람이 정비업도 하는 등 여러 분야가 마구 섞인 채 유지되었다. 자동차도 많지 않고, 소수 부유한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동차공업이라는 분야가 형성되는 초창기 모습이었다.

이처럼 자동차를 중심으로 영업, 판매, 기술의 여러 업종이 섞여 있던 초기 단계에서 벗어나 기술 분야가 분리되었고, 여전히 정비와 차체 제작을 병행하는 형식이더라도 이전보다는 한 단계 진전된 형태로 나아갔다.

공업과 디자인은 이처럼 근대로의 전환 과정에서 동일한 지점에 있었다. 서구의 디자인 어법을 수용하는 과정으로, 자동차 기술의 주변부에서 기술 분야가 자리 잡아가는 과정으로 함께 근대 경성을 열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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